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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틴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인에 주는 교훈
  • 기사등록 2015-09-13 22:26:31
  • 수정 2017-02-12 15:4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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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매 단풍 들것네 (김 영 랑) '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곫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래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이 나를 보아라 '오 - 매 단풍 들것네'

 [시사바로타임즈=장혜린,장훈녕기자]


기요틴(단두대)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요틴은 흔히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1792~1793)와 연관되어 매우 잔인하고 악명높은 형벌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인도적이고  평등한 형벌이라는 이유로 채택되었다.

 

1789년 국민의회 의원이던 기요틴(Guillotin)은 국민의회에서 모든 사형수는 누구나 동등하게, 가능한 신속하고 고통없이 처형당해야 함을 입법으로 규정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전에는 귀족의 특권이었던 참형(斬刑, decapitation)은  효율적이고 인도적인 사형방법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1792년 입법의회는 Dr,Antoine Louis에게 기요틴 의원이 말한 기준인 인도적,효율적이고도 평등한 처형방법에 합당한 기계를 고안할 것을 주문했다. 기요틴은 이러한 취지에서 채택되었다.

 

1791년 프랑스 법전의 제3조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은 자는 누구나 그 목을 절단한다"(언듯 보기엔 잔인해 보인다)라 규정하고 있는 데,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동일한 유형의 범죄에 대해서는 지위,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로 처벌된다는 법앞의 평등한  죽음의 의미, 잔인하고 오래끄는 처형방법이 아니라 순간적인 죽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1792년 처음 사용된 기요틴이야말로 이러한 원리를 완벽하게 담보할 수 있는 도구로 평가되었다.

 

기요틴을 통해 죽음은 여전히 가식적이긴 하나 순간적인 사건으로 축소되었다. 법집행자와 사형수의 접촉은 최소한도로 줄어든다. 과거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었던 "죽음에 이르는 길"은 극도로 축소된다. 길로틴은 신체를 거의 자극하지 않고 생명만을 박탈한다. 논리적으로 볼때 여기서 법의 적용대상은 감각이 있는 육체라기 보다는 생명권의 소유자인 법적 주체(a judical subject)인 것이다.

 

한편 북한에 잔재해 있는 공개적인 처형은 역사상 군주의 권력을 본보기로 과시함으로써 군주권에 대한 공포심과 위엄을 제고하는 효과를 의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처형장면은 군주의 위엄을 드러낼 목적으로 공개리에, 가능한 잔인한 방법으로  연출되었다. 역사상 기요틴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낡은 공개처형 방법이 곧바로 폐지되지는 않았다. 19세기 초반에 들어 인간의 몸뚱아리를 공개적으로 전시,처벌하던 방식은 다소 사라졌다. 

 

장 혜 린, 장훈녕 기자 hljang@sisabaro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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